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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Zero

GOTCHA!

" 그래서, 이거 진짜 훔쳐온 거야? "

" 으엄. 처음에는 진짜 훔쳤는데 나중에 교수님한테 달라고 땡깡부리니까 그냥 나 가지라고 주시던데? 이제 합법적으로 내 거다. "

" 그거 그냥 교수님이 너한테 질려서 주신, 악!!! 물었어!!! 얘 진짜 물었어!!! "

" 후. 조용히 하고 이름이나 적어라. "

 


 

제로 블라인드의 인생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은 그리도 찾아 헤매던 낭만일 터다. 계명성, 가장 밝은 별. 태양도 달도 아닌, 눈으로 보기에 한낱 점에 불과할 테지만 길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북극성과도 같은 것.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 순간에 불과한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인생에 이정표로 남을 순간들.

 

팀원들의 이름으로 가득 메워진 골든 스니치를 들어서 빛에 비춰본다. 반사된 빛이 눈을 찔러 인상을 찌푸리는 그 순간에조차 제로 블라인드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별빛에 지독하게 매료된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들여다보고만 있다가 고개를 돌려 모인 사람들을 봤다. 이름을 불렀다. 에버그린, 올리버, 마거릿, 수잔⋯ 이어지는 이름들, 이름들. 매번 그리 친근하게도 불러대던 애칭이 아닌 그 이름들 하나하나 입에 담으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모든 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산발적으로 웃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날아가지 않을 골든 스니치를 손으로 꽉 쥐어 잡고 입을 열었다.

 

" 우리들이 다시 만나서 다 같이 퀴디치를 하는 순간이 오는 건 어렵겠지? 다들 바쁠 테니까, 어쩌면 우리 서로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잊어버릴 수 있겠다. 그런데, 있잖아. 나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기쁘다고, 졸업 직전에 다 같이 모여서 이렇게 웃어버릴 만큼 서로에게 큰 힘이었고 기쁨이었다고. 그 정도는 기억해주면 좋겠어. 적어도 나는 이 날을 평생 기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이 순간을, 오늘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날이 분명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오늘이, 그런 힘이 될 수 있었으면 해. "

 

사근한 목소리가 동화를 말하는 듯이 맺혔다. 제로 블라인드는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연장자가 가장 어린 아이들을 모아놓고 오랜 옛날 이야기를 읊어주는 것처럼, 책도 그림도 없는 순간에 한번 들은 모든 이야기들을 잊은 순간 없던 사람처럼 기쁨을 말하곤 했다. 그렇게 환희를 보였다. 손을 뻗어 사람들을 모으고, 다시 그 사람들을 끌어안아 함께 온기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게 제로 블라인드였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마법이라며, 오늘 우리는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일거야. 웃음과 함께 속닥거리는 말에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가, 지금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 졸업 축하해. "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노란 꽃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소란한 분위기 와중에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노란 빛이라. 꽃잎이 흩날리던 그 때에 제로 블라인드가 무슨 얼굴을 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마저도 그 날 그 때에 무슨 얼굴을 했는지 몰랐다. 지긋지긋했고, 지루했고, 기뻤고, 슬펐고, 실망과 기대와 체념과. 많은 것들이 뒤섞여있던 탓에.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 와중에 제로 블라인드는 아주 높게도 날았고, 낮은 곳에서 구르기도 했으며⋯. 뭐, 사소한 것들은 중요치 않다. 흐릿한 시야, 눈을 깜박거리다가 손 끝으로 이제는 색이 바랜 골든 스니치를 쓸어본다. 새기듯 적힌 이름들, 다시 만난 이름과 다시 만나지 못한 이름.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들.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그 날이 선연하게 박혀 있다. 그렇다면 그걸로 됐다. 나는 이제 다시금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음이라.

 

그간 제로 블라인드는 거짓말이 늘었다. 원래도 못하는 축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쌓여 능숙함을 만들었다. 온화함과 냉막함을 동시에 가진 인간상이라, 인간을 불신하면서도 기대할 줄을 알았고 체념하고자 했음에도 움직일 줄 알았다. 면피성의 발언, 날카로운 상황 속에서 유들함을 가장하고 적당히 풀어내는 것. 처세를 익히면서 제로 블라인드의 낭만 타령은 한꺼풀 숨이 죽은 듯 했다. 이제 정말 자라버렸느냐고, 정말 모든 것에 질려버렸냐고, 더 이상 네 심장에 금빛이 없느냐고 묻노라면 잠시 말을 못 할 만큼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제로 블라인드는 낭만에 살고 죽었다. 사람으로 인해 숨을 내쉬었다. 금빛을 따라 발을 딛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살고자 한다면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달리고 날았다. 멈춰야만 한다면 그것은 다음을 위한 도약일 터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서⋯.

 

그래서 너는 대체 어디로 가고자 하느냐고, 누군가 물었더니 제로 블라인드가 그렇게 답했다. 농담처럼.

 

하늘 넘어서 금성이라도 따다주려고. 너네한테.

 

그게 은퇴 전, 제로 블라인드의 생일날 들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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