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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Zero

Missing: Golden Romance

제로 블라인드의 인생에는 부정 불가능의 명제가 있다.

사는 건 더럽다.

스피너즈 엔드에서 열, 호그와트에서 넷. 고작 열넷을 보내고 명제를 내세우기엔 이른가? 스스로의 인생을 돌이켜보건데 저 명제를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눈 뜰 때부터 구술해볼까. 낳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이름도 몰랐다. 구정물 흐르는 스피너즈 엔드, 먼지와 걸인, 사람만도 못한 것들이 뒤섞인 곳에서 태양이 작열하던 날에 태어났다. 길가에 버려진 갓 태어난 애를 죽일 순 없어서,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키고자 한 사람들에 의해 자랐다. 맨발로 술병 깨진 자리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뛰어다니던 그 천방지축. 이름은 없어도 모두가 그 애를 알았다. 검은 머리칼에 푸르고 노란 눈을 한 그 애, 대낮에 보면 밤같아서 그리도 눈에 띄던 걔. 누구는 걔를 나이트라고 불렀고, 그냥 검은 머리 걔라고도 했고, 짝눈이라고도 하고. 사실 명명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고아는 그 거리에 널려있었다. 걔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았고 걔보다 행복한 사람도 많았다. 나 혼자 챙기고 살기도 바쁜 순간에 나돌아다니는 어린애 하나, 그러니까 책임져야할 것 늘리려는 사람은 없었다.

평범하고 흔하기 짝이 없는 어린애. 얼음같고 물같은 눈, 불순 없이 말간 금빛으로 세계를 바라보던 그 애.

어느 날 그 애가 옆에 있던 애 손 잡고 속닥거렸다.
이대로 지붕도 벽도 없이 사는 건 억울해. 우리도 성을 내걸자. 가족을 만들자,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를 울타리 삼아서, 우리 서로를 책임진 채로 이 거지같은 삶을 버텨내보자⋯. 내가 맏이를 할게, 너는 내 동생을 해. 괜찮아, 내가 너를 지킬거야. 가장 앞서면서도, 아무도 내 뒤에 남겨놓지 않을 거야. 0번. 너희들의 최선이고 최후인 숫자가 될게.
그 날 그렇게 블라인드의 제로가 나왔다.

이름 하나 생긴다고 삶이 나아지진 않는다. 나의 삶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은 각박하고 차갑다. 낭만주의가 전성을 누리던 19세기가 지났다. 배는 여전히 고팠고 애들은 많았다. 되도 않는 텃밭을 꾸리고 되는 건 다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다. 진솔하게,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 여러번이었고, 그냥 드러누워서 하루는 물론이고 일주일은 쌩으로 날려먹고 싶었다. 울었고, 상처 받았고, 욕했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근데 그것도 지쳐서 다 그만두고. 그렇게 평범하게 찌들어 살았다.

호그와트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니까. 누가 순수하네, 누가 섞였네. 누가 똑똑하고 멍청하고. 끊임없이 우열을 가르고 다니는 것들 사이에서 제로는 그냥 한결같이 0번이었다. 누구한테는 제일 낮은 번호, 누구한테는 제일 높은 번호. 그냥 0번을 내걸었고 남들이 알아서 낮추거나 높였다. 환멸을 느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해야 했다. 지루했거든, 정말로.
야, 생각을 해봐. 시대가 어느 때인데 남의 피 가지고 우열을 나누고 자빠졌냐고. 왜 사람 한계를 태생으로 한정짓느냔 말야. 비행기 발명된 지가 언제고 전화기 나온 지가 언젠데. 우리는 이렇게 더 나아질 수 있는데, 근데 왜 아직도 이렇게⋯.

 

⋯꼴불견으로 살아.

제로 블라인드가 절망한다면 그 사유는 오로지 인간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래, 인간이었다. 그 많은 근거에도 기어코 사람의 가능성을 찾아 헤매는 하나의 인간. 언제고 살아 숨을 내쉬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사람. 절대로 삶만큼은 부정하지 않아서, 나는 죄 지은 적 없노라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던 사람. 숨을 이어갈 사유, 아주 작은 들꽃과 하늘을 가득 메우던 별들, 그렇게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낭만을 찾아 헤매던 인간.

 

다시 말하자. 작금의 세계는 더럽다. 낭만주의가 전성을 누린 지 어언 1세기, 세태는 낭만을 상실했다. 전쟁이 세계를 휩쓸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직 냉소만이 잔존했다. 아름다웠던 달과 별이 지고 오만한 태양이 하늘을 독점했다. 도처에 널린 냉소와 인간의 지성이 가로등처럼 훤하여 하늘의 별은 매연 위로 자취를 감췄다. 모험은 남의 일, 나침반과 지도는 낡고 닳았으며 동화는 헌책방에 쌓인다. 로맨스는 구시대의 것, 현세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마땅히 현실을 살아야 하는 법일진데 제로 블라인드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치 않다고 느낀다.

구가할 청춘이 없는 현재가 지나치게 지루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낭만, 모험, 서사시가 고팠다. 신이 배제된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 피와 땀과 노력,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일궈낸 것들을 바랐다.

 

독재가 드리운 정오의 하늘. 제로 블라인드는 별을 찾아 헤맸다. 태양을 등지고 날아올라선 하늘 아래 오만 곳 뒤지고 다니며 '낭만'을, 그래. 이 길고 긴 냉전을 끝내줄 '골든 스니치'를 찾아다녔다. 하염없이, 신발 안 발이 부르틀 때까지 뛰고, 손에 나무 가시가 박힐 만큼 절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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