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돌아보자. 애초에 리첸티아 블리스 서머싯은 태생적으로 자아라고 할 만한 게 희박한 아이였다. 막 첫 숨을 들이킬 때의 울음조차 고요한 아이. 부모를 빼다박아 외관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으나 그 본질은 무생물에 가까웠다. 투명한 수정의 원석. 아이의 말간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머싯 부부는 이 아이를 사랑으로 채워주자고 다짐했다. 애정으로 세공하여 꽃을 피우자. 리첸티아, 블리스. 방종과 축복, 행복을 가득 기원하며 이름을 짓고 태어나던 날 가장 만개하던 라일락 꽃으로 애칭을 정해 불렀다. lilas, 보석정원의 하나 있는 라일락, 사랑스러운 우리의 리라. 너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네 발 밑에는 레이스를 깔고 요람은 보석으로 장식해줄게. 찬연한 애정을 세례받으며 그들 아이가 숨을 내쉬었다.
그리하여 리첸티아 블리스 서머싯의 인생에 첫번째 계율이 세워진다. 부드러운 천에 보석과 꽃으로 사랑을 적어내린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계명. 오직 그것만이 리첸티아 블리스 서머싯이 살아가는 이유였고, 목표였으며,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였다. 그것 아니고서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모르도록 스스로를 다스렸다. 사랑 아닌 모든 것을 외면하고, 그것에 목메었으며, 사랑과 봄을 신들의 권좌 중 가장 드높은 곳에 올려놓고는 그 발치에 엎드려 웃었다. 신의 뜻에 따라 기꺼이 눈을 가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서정시와 온갖 연가들을 경전으로 두고, 선량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울타리 밖의 미물들을 대하였으며,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성장처럼 보이는 눈가림을 해내고 아무 부끄러움도 이질감도 없이 그저 유순하게 웃어보였다. 리첸티아 블리스 서머싯은 제 선 안의 사랑스러운 봄꽃들이 내도록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기에, 마음에도 없는 일들 따위 몇천번이고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가리고 우자인 척을 하여도 사실은 알았다. 이 시대, 낭만은 6피트 아래에 파묻혔고 사랑은 고루해진 지 오래인 지금. 영원은 시와 연극, 허구 속에서나 힘을 얻는다는 것을.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았던 탑이 무너진 이래로 모든 영구적 가치를 박탈당했으며 시간은 멈추는 법 없이 흘러가노라고. 꽃은 마땅히 시든다. 전부 알고 있었다. 눈 가린 우자를 자청했으나 귀를 막지는 못하여 흘러들어오는 현실을 알아챘다. 모든 게 깨어질 걸 알면서 영원을 말하고 함부로 다정하였다. 겨울을 맞은 생물에게 이제 봄이 올텐데 왜 그리 추워하냐며 손을 내밀었다. 기만이고 광기였다. 아, 신이시여.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자를 어여삐 여기시고…
그러나 그 애 신, 사랑은 참으로 자비로워서. 봄날 꽃을 닮은 손 끝으로 그 애 눈을 가리고 네 죄를 사하노라, 하고 상냥하게 속닥거린다.
리첸티아 블리스 서머싯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린다. 봄에 온전히 취하여, 깨지지 않는 꿈을 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