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오래 앓아온 지병이고 불치병이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믿지 못하여 헤매일 것이고 맹목과 맹신을 경계하겠지. 다만, 그래, 적어도 네가... 그들처럼 나를 버려둘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의 뒤에 더 높은 어딘가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기에 많은 이들처럼 그 멀리로 가버릴 수 있겠지. 나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고 특별한 깨달음 같은 건 없었으니 계속 이 공간에 남아있을테고. 손을 뒤로 더 뻗어 티나지 않을 만큼만 너의 옷자락을 쥔다. 나는 이제 무언가에 절절해지는 법 같은 거 모르게 됐으니 너는 진실로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너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 너도. 나를 오늘에 남겨둘 거라면 너 또한 내일로 나아가지마라. 들여다보았다면 그만한 책임은 져야지 않겠어. "
그러나 내뱉는 말은 발목을 붙드는 것이다. 상대적 다정이 지나친 기대를 이끌어낼까 두려운 탓에 천천히 팔을 놓는다. 몸은 여전히 네게 숙여준 상태로, 어정쩡하고 불공평한 자세가 되어 가만히 생각을 이어간다. 수용, 이해. 배척은 없었고 나는 다시 너를 이해하고 수용하였는데 이것은 영구불가침의 명제인가? 우리는 이곳에 고정됨으로서 불멸을 꿈꿀 수 있는가. 아니다, 인간에게 그것은 너무 바라는 거지. 모든 감정과 생각은 변하고 사그라들며 내가 너에게 새긴 기억과 이름표도 오랜 세월을 보내면 절로 스러질테다. 맹신은 오래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앙에 의심이 싹트는 것마저 사람의 일이니까. 병증이 지독하여 웃는다. 나는 이런 병자의 몰골로 네 앞에 서서 신을 자처하는데 너는 계명까지 지어주는구나. 재난 앞에서 우리는 전원이 병들어있으므로 이러한 것마저 평범한 꼴일지...
" 신도라고는 너 뿐이니 계명 또한 네 마음대로 짓는 게 당연하겠지. 무언가를 남기는 건 언제나 신도의 몫이니까. 하면 계명 그 첫째는 네 곁에 내가 있음이라, 뭐 그런 거고. 나머지는... 적당히 채워. 어차피 다시 없을 종교니 열개 꽉 들어채우지 않아도 되잖아. "
너는 나의 책임마저 자처하는지.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계명은 너에게 새기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 새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애틋한 감정 같은 게 없으니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수는 없겠으나 내가 해야 할 일 정도는 할 수 있다. 다시 손을 들어 네 이마 위를 손 끝으로 짚고, 너는 악을 부정하지 말지어다, 속으로 외우며. 이로서 여기에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간이 남았음을 인정하고, 불행과 불신과 불안, 폭력과 부정과 모든 더럽고 추잡한 것들의 탐구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 세례 아니면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