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한 정신을 일깨우려 눈꺼풀을 들어본다. 깜박거림은 느리다. 창 밖이 붉었던가, 파랗던가, 꺼멓던가 흐렸던가도 감 잡지 못한다. 이제 나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어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른다. 죽어서 잊혀가는 이들이 다 그렇지. 사실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는 시간 내내 내도록 불편했다. 너희는 이상하게 정이 많고 쉽게도 슬퍼하여서, 항상 사진관 앞 유리창 안의 대형액자에 걸린 단란한 가족사진처럼 내게 닿을 수 없는 것 같았거든. 그 안에 감히 내가 끼어서 이 그림을 망칠까 하는 게 그토록 염려되었다.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듣고, 그게 너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지독할 만큼 끔찍했다. 내가 바라던 건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래, 나를 오래도록 잠식한 그 허함과 존재를 같이 하여 생각 같은 것 전부 내버리고 침잠하는 거였다. 이 생 살아내는 것 하나 하나 벅차게 기뻐하여 미래를 기대하고 다음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안식, 공허. 그게 내 오랜 숙원이었다. 그런데 몇몇 이들이 귀찮게도 내 삶을 바라더라. 죽은 게 말하는 환청까지 살라 말해서, 그냥, 버겁지만 살았다. 너희 사는 거 보고 싶어서 끼어들었고, 졸업도 챙겨보고 싶었고, 나가면… 어쩌면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했다. 살아내다 보면 행복한 날들이 있을 거라고.
애초 본질부터 글러먹은 인생이었고 끝조차도 그렇게 썼으니 더 후회를 얹지는 않는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짧은 글줄 몇개 연표처럼 써놨을 내 일대기는 이제 마지막 마침표에 잉크를 누른 참이고, 펜조차도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죽은 자는 주체일 수가 없다. 몸 없고 말 안 닿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그러니 운명 받아들이고 너네한테 넘길 거 넘겨주고 모든 끝난 이야기들이 그러하듯 잊혀질 참이다. 졸업장, 세세하게 써준 거 몇장이고 남은 건 닿지도 않을 말로 떼워서 미안하지만, 주체도 못 되는 형상 이끌고 이 정도 하면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열린 창가로 스며드는 바람 기분 좋게 바라보며 눈 감는다. 아, 이제 정말로 종막이다. 졸업이고 이별이다. 이 지긋지긋한 생, 지나치게 아름다워 기어코 나를 미혹시키기에 성공했던 사람들아. 잘 있어라. 잘 흘러 어디든 너희 좋아하는 곳에 닿길 바란다.
" 졸업 축하한다, "
너네 부반장은 너네랑 같이 있는 것보다 좋은 곳 보여서 냅다 발 들이민 놈이니 굳이 기억하지는 말고. 오래, 길게 살아라. 이왕 할 거 아주 행복하게. 내가 질투할 만큼.